1997년 일본에서 개봉 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 일본의 민간신앙을 토대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당시 일본에서 타이타닉이 개봉되기 전까지 1300만명을 동원해 큰 흥행을 기록했으며 영화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는 2003년 전체 관람가로 개봉되었다.

평화롭던 마을에 재앙신 타타리가미가 나타나 마을을 해치려한다. 에미시 일족의 차기 족장인 아시타카는 재앙신에게 화살을 날려 쓰러뜨리고, 오른쪽 팔에 저주가 깃든 상처를 입게 된다.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떠나기로 결심, 여행을 떠나 타타라바 마을에 도착한다.
철을 만드는 마을, 타타라바의 여지도자 '에보시'는 숲과 숲의 신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숲을 파괴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아시타카는 들개의 신 '모로'와 모노노케 히메 '산'을 만나게 되지만 외면당한다.
아시타카는 자신이 저주에 걸리게 된 원인이 에보시와 인간들에 의한 것임을 알게된다. 에보시가 멧돼지에게 총을 쏘았고, 분노한 멧돼지가 재앙신으로 변해 아시타카의 마을로 쳐들어왔고, 따라서 재앙신을 죽인 아시타카가 저주를 받았던 것이다.

아시타카는 에보시와 싸우려 마을로 내려온 산을 구해 사슴신의 숲으로 향한다.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아시타카는 인간의 마을에게 등을 돌린 채, 사슴신의 숲으로 계속해서 걸어간다. 산은 자신을 구해준 아시타카를 시시가미가 나타나는 장소에 옮겨놓고, 시시가미가 나타나 아시타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부상당한 몸이 낳을 때까지 산과 함께 지내던 아시타카는 들개신 모로에게 인간과 신들이 공존할 수 없냐고 묻지만 결국 타타라바 마을과 숲의 신들은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숲이 온통 사체로 뒤덮이고, 산은 죽어가는 멧돼지의 신 옥코토누시를 살리기 위해 시시가미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러나 도중에 인간들의 방해를 받고, 옥코토누시가 분노에 휩싸여 재앙신으로 변하며 산을 흡수하려한다. 그러자 시시가미가 나타나 산을 구해내고, 옥코토누시와 모로는 죽어버리고 만다. 시시가미가 사슴의 허물을 벗고 밤의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할때 에보시는 총을 쏴 사슴신의 목을 잘라버린다. 그러자 아시타카가 여행중에 만난 지코보라는 승려와 그의 일행이 시시가미의 목을 가지고 도망간다.
이에 분노한 시시가미는 죽음의 기운으로 변해 숲의 생명을 앗아가기 시작한다. 아시타카는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려는 산에게 모두 다 같은 인간이니 도와달라고 간청하고, 산과 아시타카는 에보시를 숲에서 내보낸 뒤 다시 숲으로 향한다. 둘은 시시가미에게 목을 되돌려주고, 시시가미는 쓰러지며 자신의 생명으로 숲을 되살린다.


시시가미의 생명으로 숲에는 새싹이 트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다. 저주에서 풀려난 아시타카는 산에게 인간들과 함께 살라고 말하지만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는 산은 숲에서 사는 것을 택한다. 아시타카는 산은 숲에서, 자신은 타타라바 마을에 살며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한다. 한편 에보시는 들개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조짐과 함께 다시 마을을 재건하리라 다짐한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첫부분에 등장한 재앙신은 죽어가며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는 자연의 증오와 한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이자 가장 큰 메시지이고, 또한 1997년에서 2013년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파괴하고자 하는 인간들에게 전하는 애원이기도 하다.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시시가미숲은 일본 야쿠시마의 시라타니운스이쿄 숲을 배경으로 했다. 영화에서 배경, 특히 숲이나 자연은 극사실주의에 가깝도록 선명하고 세세하게 표현된다. 반면 동물이나 인간의 모습은 만화적으로 단순하게 등장한다. 이것은 움직이며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등장인물에게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아두기 위함이고, 동시에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주제에 걸맞게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표현하려 한 의도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들개의 신 모로는 "숲을 파괴한 인간들이 내 이빨을 피해가려고 내놓은 아이가 바로 산이다"라고 외친다. 인간들은 숲을 지배하려 하며 숲의 정령, 숲의 신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산을 숲으로 보냈다. 영화에서는 산이 숲으로 오게된 계기나 산의 과거, 일생 등이 다뤄지지 않는다. 모로의 말에 의해 산이 인간들에게 버려져 숲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산은 자신이 인간이 아닌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끝내 인간들을 용서하지 못한 채 숲에서 살아가게 된다.
인간들은 숲의 신들을 달래기 위해 산을 보내놓고도 다시 숲을 파괴하려 한다. 이런 인간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에보시는 인간과 숲의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것도 모자라 사슴신의 목을 잘라버리는 행동까지 한다. 영화를 보며 관객들은 에보시를 '악역'으로 놓고 산과 아시타카를 응원하겠지만 실제로 우리의 위치는 에보시와 숲을 파괴하려는 사람들과 같다. 인간은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고 더욱 윤택한 삶을 위해 '태초부터 인간을 키우고 살아가도록 만든' 인간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짓밟았다. 만약 인간이 자연을 적대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하늘높이 뻗은 빌딩과 수많은 건물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조차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불가피한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인간은 이미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만큼 발달된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고한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상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고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63년 도에이 영화사에 입사하면서부터 애니메이션의 제작과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미야자키는 '종이에 손으로 직접 그리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근본'이라는 자신의 신념 아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다가, 기술의 발달에 의해 좀 더 나은 제작기법이 필요해지자 1995년 컴퓨터그래픽 부서를 개설했다. <모노노케 히메> 또한 디지털 페인팅과 셀 기법의 첨단화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전체 분량의 10% 정도 뿐이고 나머지는 전통적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모노노케 히메>뿐 아니라 그의 다른 영화에서도 자연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대부분 환경과 인간을 동시에 등장시키며, <천공의 성 라퓨타>에 하늘을 나는 장면을 삽입하거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광대한 자연과 전쟁 의식을 다루는 등 그의 신념이 확고한 영화를 제작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어린시절을 보냈고 이러한 인간들의 사회에 혐오감을 느꼈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그가 동경하는 세계, 증오하는 세계, 그리고자 하는 세계가 명확이 재현된 '자연, 환경, 전쟁, 인간'을 다룬다. <모노노케 히메>의 시대적 배경 또한 일본의 군국주의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실제 이 시기의 일본 사회와 사람들은 자연을 파괴하려 들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특징이 있다. 여성성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소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 주인공으로는) 결국 나치, 즉 누가 보더라도 악한 세력인 어떤 적과 맞서는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남자 주인공으로는 관습적인 이야기밖에 만들 수 없다고 믿었다. 때문에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원령공주인 산이 아시타카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마녀 배달부 키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마루밑 아리에티>등의 작품에서도 소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지브리사의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념과 상상력을 대변하는 수단이라라 해도 무방하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재앙신이 지렁이에 뒤덮인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처음 등장한 멧돼지가 죽거나 옥코토누시가 변하는 장면 등 과하게 혐오스럽게 표현되는 부분이 등장한다. 나는 이러한 장면이 등장하는 이유가 관객들, 즉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자연과 대비되는 자연신의 모습은 인간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억울함과 분노를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멧돼지는 단순히 털이 뒤덮인 짐승으로 그리기 보다는 더욱 야성적으로, 말하자면 우툴두툴한 돌기로 뒤덮인 얼굴, 이물질이 분비되는 입과 눈등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징그럽게 표현되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피를 흘리거나 토하는 장면, 팔과 목이 잘려나가는 장면 또한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는 심하게 호러적이다. 2003년 우리나라에서 무삭제 전체관람가 등급을 받았지만 결국 나중에 15세 관람가로 등급이 상향조정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15세도 별로다)

<모노노케 히메>는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영화지만 모든 훌륭한 예술과 대작이 그러하듯 지금도 손색없는 영화다. 시시각각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자 미래다. 한편으로는 산과 아시타카가 숲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시기는 이미 지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의 환경단체들은 무분별한 환경파괴를 반대만 하고 있을 뿐 지구의 환경파괴가 가속화되는 현재 시점에 실제로 행사하는 영향력은 극히 적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환경을 지키려는 자와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파괴하려는 자가 팽팽히 대립되던 시기도 없어지고, 이제는 더욱 거대해질 인간들의 세계를 위해 자연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자리잡을 것이다. 각 나라마다 환경과 동물을 보호하는 법을 개정하고 아파트나 집을 자연을 해치지 않고 짓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인간사가 지금보다 고도로 발달하며 자연이 아닌 기계와 손을 잡는 이상 시시가미숲의 비극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브리스튜디오의 옛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험과 아름다운 자연을 함께 감상하고 싶다면 <모노노케 히메>를 찾아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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